보우대사(普雨大師) 여시아문 200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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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대사(普雨大師) (1509∼1565)

조선 중기의 고승. 호는 허응(虛應) 또는 나암(懶庵), 보우는 법명이다.

가계 등은 미상이며, 15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그뒤 금강산일대의 장안사(長安寺)·표훈사(表訓寺) 등지에서 수련을 쌓고 학문을 닦았다.
6년 동안의 정진(精進) 끝에 마음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법력(法力)을 얻었고, 그밖에도 대장경을 모두 섭렵하는 한편 <주역>도 공부하였다.
당시 그를 지도해준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으나 여러가지 문헌을 종합해보면, 경기도 용문사(龍門寺)의 견성암(見性庵)에 있던 지행(智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재상이었던 정만종(鄭萬鍾)과의 특별한 사귐으로 인해 문정대비 (文定大妃)와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548년(명종 3) 12월 봉은사(奉恩寺) 주지에 취임하여 제일 먼저 문정대비로 하여금 <경국대전>의 금유생상사지법 (禁儒生上寺之法)을 적용하여, 능침(陵寢)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리고 물건을 훔친 유생들 중에서 가장 횡포가 심했던 황언징(黃彦澄)을 처벌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봉은사와 봉선사(奉先寺)에는 방(榜)을 붙여 잡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킴으로써 유생들의 횡포를 막게 하였다. 이러한 일은 조선시대 와서 처음 있는 일로서 유생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끝내는 이 문제가 조정에까지 비화되었다.

문정대비가 이러한 조처를 한 것은 보우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 하여 1549년 9월 20일에 성균관 생원인 안사준(安士俊) 등은 요승 보우의 목을 베고 황언징을 풀어달라는 강력한 건의를 조정에 올렸다. 그러나 문정대비는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문정대비·보우대사와 유생들 사이에는 치열한 암투가 전개되었다. 이후 문정대비로 하여금 선교 (禪敎) 양종을 다시 부활시키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게 함으로써 1551년 5월에는 선종과 교종이 다시 부활되었다.
선교 양종을 부활하라는 문정대비의 비망기가 내려진 뒤 6개월 사이에 상소문이 무려 423건이나 되었고, 역적 보우를 죽이라는 것이 75계(啓)나 되었다.
그러나 보우대사는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佛法)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불법을 보호하고 종단을 소생시키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1565년 4월 7일에 문정대비가 죽고, 대비의 장례를 마친 유생들은 곧바로 보우의 배척과 불교탄압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 가운데 이이(李珥)가 <논요승보우소 (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것을 주장함에 따라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보우는 1565년 6월 12일에서 7월 28일 사이에 붙잡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보우대사의 죽음이 서울에 알려진 것은 10월 15일이었다.

보우는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를 중흥시킨 순교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는 선교일체론 (禪敎一體論)을 주창하여 선과 교를 다른 것으로 보고 있던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잡았고, 일정설(一正說)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저서로는 <허응당집(虛應堂集)>3권과 <나암잡저(懶庵雜著)>1권,
<수월도량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 (水月道場空花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1권, <권념요록(勸念要錄)>1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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