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대덕시리즈-보조국사 지눌 여시아문 200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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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고려중기의 고승(高僧)이자 선종(禪宗)의 중흥조. 성은 정(鄭)씨.
자호는 목우자(牧牛子). 황해도 서흥(瑞興)출신.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낸 광우(光遇),
어머니는 개흥군(開興郡) 출신의 조(趙)씨이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이 잦아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썼으나
효험이 없자, 아버지는 불전에 기도를 올려 병만 낳으면
자식을 부처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뒤 병이 깨끗이 나았으므로 8세 때 부모가 정해준 대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사堀山派)에 속하였던 종휘(宗暉)에게 나아가 승려가 되었다.

꾸준한 구도 끝에 1182년(명종 12)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전남 청량사(淸凉寺)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열람하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매 육근(六根)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알지만, 그 진여자성은 바깥 경계들 때문에 물들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며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에 이르러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때 심성(心性)의 본바탕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의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각하여, 양측은 서로의 우열을 논하면서 시비만을 일삼았다.

이에 그는 선과 교가 모두 부처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어찌 서로 담 쌓고만 있는가를 의심한 나머지, 3년동안 노력한 끝에 <화엄경>의 여래출현품에서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건만 어리석은 범부는 스스로 알지 못하도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닫고, "부처의 말씀이 교가 되고 조사(祖師)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이 되었으니,
부처나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근원을 추구하지 않고 각기 익힌 것에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키며 헛되이 세월만 소비할 것인가."하며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였고, 이에 입각하여 원돈관문(圓頓觀門)의 지침을 확립한 것이다.

또한, 그는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둘이 없는 원칙에서 선교불이(禪敎不二)의 원리를 발견하고, 또 당나라 규봉종밀(圭峰宗密)의 저술인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선교합일의 이론을 정립하여, 마치 원수처럼 등을 지고있던 종래의 선교양종에 대하여 선교합일 회교귀선(會敎歸禪)이라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수한 종지를 창도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라는 결사문에서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로 전환될 수 있음을 천명하였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에 있다고 하였다.

이 정과 혜의 두 가지는 일심 위에 통일되어 늘 균형을 지녀야 된다고 본 것인데, 이것은 한 부처의 가르침이 선교양종, 정혜이파(定慧二派)로 분열되어, 정과 혜가 한마음 위에 통일될 때 온전한 불교공부가 된다는 것을 망각한 채 시비를 일삼고 적을 삼아왔던 당시 불교계 수행법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결사운동은 정법불교에로의 복귀 작업이었고, 결사문은 부패하고 타락된 당시의 불교현장을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일대 선언서였다.

10여년 동안 송광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다가 1210년 3월 27일 대중들과 함께 선법당(善法堂)에서 문답을 끝낸 뒤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두세 번 치고 "천가지 만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말을 남긴 다음 법상에 앉아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권수 정혜결사문> 1권, <직심직설(眞心直說)> 1권,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1권, <원돈성불론> 1권,
<화엄론절요> 3권,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1권,
<염불요문(念佛要門)>1권, <상당록(上堂錄)> 1권 등이 있다.

입적 후 국사(國師)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탑호(塔號)는 감로(甘露)이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불교 인물사상사>(불교신문사편. 1990), <동사열전>(광제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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