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양선사 언기(鞭羊禪師 彦機) (1581~1644) 여시아문 2008.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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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양선사 언기(鞭羊禪師 彦機) (1581~1644)

조선 중기의 고승. 성은 장씨. 법호는 편양(鞭羊). 경기도 안성군 죽산(竹山) 출신.
어머니는 이씨이다. 어머니가 이상한 태몽을 꾸고 낳았으며, 11세에 출가하여 휴정(休靜)의 제자인 현빈(玄賓)에게 계(戒)를 받았다. 그뒤 금강산에 머물면서 교학(敎學)을 익히는 한편, 참선을 닦았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묘향산 서산대사의 밑에서 선을 닦았고, 이후 서산대사의 법(法)을 받은 적사 (嫡嗣)가 되었다. 그뒤 어느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고 남쪽으로 편력하면서 고승들을 찾아 깨달음을 점검받았다. '양을 기른다'는 뜻을 지닌 그의 당호 편양이 가리키듯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자주 시정(市井)에 나왔다.

그의 시문(詩文)이나 선교(禪敎)에 대한 법문은 매우 간결하고 쉬운 것이 특징이다. 평소에도 심산유곡에 은거하여 수도하면서 혼자만의 법열(法悅)에 잠기는 것은 결코 불교의 진면목이라 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깨달음을 얻는 것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뜻은 그의 행적에 적지않은 일화를 남겼다. 특히, 숯장수와 물장수를 하였기 때문에 평양 인근의 사람들은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는 교와 선을 두개의 별문(別門)으로 보지 않는 서산대사의 경향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교안에서도 일승(一乘), 이승(二乘), 삼승(三乘) 등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불경은 청중의 근기(根機)에 따라 설한 것이므로 처음부터 대승(大乘)과 소승(小乘), 심천(深淺)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일종의 교판(敎判)을 내세웠는데, 화엄(華嚴)은 인연이 무르익은 보살인 상근기(上根機)를 위하여 단번에 보리(菩提)를 이룰 수 있음을 설한 것이고, 아함(阿含)은 성문(聲聞)을 위한 사제(四諦)와 연각(緣覺)을 위한 십이인연(十二因緣)을 설한 것이며, 방등(方等)은 보살을 위하여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설한 것이고, 법화(法華)는 앞의 삼승을 위하여 구경(究竟)의 대도(大道)를 설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상의 4가지 교의 근본원리가 곧 묘심(妙心)이라고 하였다.

또 선과 교의 관계에 대하여 "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서 단적으로 볼심을 전한 것이지만, 이것은 최상의 근기를 가진 사람만이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최상승(最上乘)이다.

그러나 세간에는 대근기의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선문(禪門)도 임시로 교를 빌려서 이로(理路: 이치의 길)와 어로(語路)를 만들어 하근기(下根機) 사람을 포섭한다.

그러므로 교는, 즉 하근기 사람이 입선(入禪)하는 문호(門戶)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또, 선을 의리선(義理禪),조사선(祖師禪), 격외선(格外禪)의 삼선(三禪)으로 구별한 것에 대하여, 이것은 수행자의 근기로 말미암은 주관적 차별이지 결코 객관적으로 선을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밖에도 그의 사상은 대략 7가지로 요약된다.

(1)경절문(徑截門)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전하는 교외별전이라는 것을 대전제로 삼았다.

(2)이 경절문 이외의 모든 경전은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설한 것이라고 보았다.

(3)비록 설한 내용이 다양하다고는 할지라도 결국 모든 교설은 일법(一法)으로 귀일(歸一)한다.

(4)이 일법은 곧 중생들의 천진한 자성(自性)이며, 이것이 곧 부처라는 것이다.

(5)모든 경론(經論)은 결국 이 자성을 밝히는 것이지만, 분별심이나 차별심을 일으키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

(6)이 자성을 깨닫는 실천방법으로는 경절문과 원돈문(圓頓門)과 염불문(念佛門)이 있는데 경절문은 공안(公案)을 통해서, 원돈문은 자성의 관조(觀照)를 통해서, 그리고 염불문은 염불을 통해서 공부한다는 것이다.

(7)이 셋은 비록 방법의 차이는 있으나 자성을 온전히 밝히려는 목적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으며, 그 어느 문을 통하여 자성을 밝히더라도 결과적인 경지(境地)는 차별이 없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그의 행적은 많은 무리를 불러 모으게 하였으며, 대중과 함께 사는 보살행(菩薩行)과 도력(道力)으로 인하여 문하에는 많은 걸승들이 배출되어, 서산대사 문하의 사대파(四大派)의 하나인 편양파(鞭羊派)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묘향산 내원암(內院庵)에서 입적할 때까지 제자가 수백에 달하였다.

저서로는 <편양당집> 2권을 남겼는데, 그 상권에 실린 <선교원류심검설(禪敎源流尋劍說)>은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장이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불교 인물사상사>(불교신문사편. 1990), <동사열전>(광제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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